미로의 도시들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도시 건설의 숨은 역군, 깡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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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도시 건설의 숨은 역군, 깡패

도시 건설의 숨은 역군, 깡패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조직폭력배, 용역깡패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Redian>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서준석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redian.org/archive/111269)

서준석(현대사분과)

 

한번쯤 ‘도시에서 살면서 과연 마주칠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해보는 존재들이 있다. 항상 뉴스와 영화 속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사람들을 때리고 괴롭히며 이익을 챙기는 자들. 몸에 새겨진 문신을 자랑스럽게 훈장인 양 드러내놓고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과시하는 자들. 바로 깡패들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며 오가는 도시에서 살면서도 대체로 이러한 깡패들은 일반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곳에 자리한 존재들로 여겨지곤 한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외로 그들은 사람들의 일상에 쉽게 나타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간단히 예를 들어, 바쁜 주일을 마치고 여흥을 즐기는 술집과 클럽에서, 혹은 빨간 락카로 ‘철거’라고 칠해진 재개발 구역의 건물 앞을 지나가면서 우린 한번쯤은 검은 정장을 걸쳤거나 아니면 ‘ㅇㅇ용역’ 혹은 ‘ㅇㅇ건설’ 등의 표식이 붙은 복장을 한 사내들을 보았을 것이다. 좀 더 예전에는 극장에서나 시장과 같은 대중적인 공간에서 손쉽게 마주칠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이들 깡패였다.

잠시 생각해보면, 이들의 주된 활동공간은 도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앞선 예에서 거명했던 공간들은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깡패는 농어촌과 같은 비도시지역이 아닌, 도시의 일상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익을 쫓아 떠도는 도시의 부나방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신상현(신상사), 조양은, 김태촌, 이강환 ……. 한국 조직폭력의 역사에서 항상 우선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에게는 커다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도시’라는 공간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출신지는 제각각이어서 김두한이 수표교 거지였음은 유명한 사실이고, 이정재는 경기도 이천, 이화룡은 평안도 평양, 조양은과 김태촌은 전라도 광주 출신이었다. 이들은 어째서 서울이라는 도시로 올라와 깡패짓을 했던 것일까? 유독 도시에서 깡패들이 터를 잡고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깡패들이 도시에 모여들어 터를 잡는 이유는 도시가 갖는 집중성에 기인한다.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는 사람과 물자가 집중되는 공간이었다. 농어촌에서의 삶은 자급자족을 통해 가능했지만, 도시에서의 그것은 농어촌으로부터 들어오는 물자에 기대어 살아야 했다. 물론 인류문명의 총체로서 도시는 법과 제도, 사회규범을 생산하고 고도화하는 공간이지만, 기본적으로 도시를 운영하는 주체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삶을 이어갈 물자를 공급해주는 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즉, 도시는 소비하는 것을 기본적 특성으로 갖는 공간이며, 이러한 특성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에서 공산품 생산이 가능해졌다고 하더라도 변치 않았다. 다시 말해 소비를 위해서 항상 농어촌으로부터 물자가 집중되어야 하는 공간이 바로 도시였다. 도시에서 도는 물자가 늘어날수록 사람들도 더 늘어났다. 물론 역으로 사람들이 더 많이 도시에 몰리면서 도시민의 필요를 채워줄 물자가 모자란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깡패들이 도시로 몰리는 이유가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조직폭력배는 크게 3가지 특성을 바탕으로 정의된다. 3가지 특성은 첫째, 조직폭력배들은 이익을 목적으로 구성된 집단이며, 둘째,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서 불법과 폭력 행사를 무릅쓰며, 셋째로 조직 내에 매우 엄격한 위계서열과 내부 규율을 유지한다는 점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도시는 이러한 특성을 갖는 조직폭력배의 활동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도시는 물자와 사람들이 집중하는 공간이다. 달리 말하면, 도시는 다양한 이익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공정하고도 합리적 절차에 따른다면 도시에서 발생하는 이익들은 가치를 생산한 생산자와 이를 구매하는 구매자들 간의 합의를 통해 분배되겠지만, 과연 실제에서 그 이익은 그렇게 공정하거나 합리적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틈새를 파고들어 일부의 이익을 가져가는 것이 바로 깡패들이다.

 

물론 국가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를 집행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다양한 제도와 공권력을 유지한다. 특히 경찰은 이익을 부정하게 나누는 행위를 감시하기 위하여 특별히 폭력을 강제할 수 있는 집단이다. 그러나 이익이 분배되는 모든 순간을 경찰이 지켜볼 수는 없다. 시장에서의 거래, 재개발 사업자와 지주조합 그리고 세입자들 간의 갈등, 유흥가에서의 일어나는 모종의 거래나 갈등까지. 공권력이 개입하기에 모호한 순간에 조정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깡패들이다. 깡패들은 이처럼 다양한 거래와 갈등의 현장에 개입하여 한쪽에 유리하도록 강압적으로 억누르며 거래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다.

 

덧붙여, 도시는 깡패들에게 숨을 곳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는 곧 익명의 공간이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는 시골과 달리 도시에서는 바로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잘 알 수 없다. 익명으로 가득한 군중의 공간에서 깡패들은 위압과 폭력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고 다시 군중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로 비추어 볼 때, 도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익을 갈취하며 존재의 의의를 확보하는 깡패들이란 한 마디로 ‘도시의 부나방’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종로에서 강남까지, 도시개발을 따라 흘러들어간 깡패

 

이른바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구 주먹으로 일컬어지는 김두한과 1950년대의 대표적인 정치깡패 이정재 등이 조직의 근거지로 삼은 곳은 시장과 극장 등지였다. 유흥주점들도 이미 이 시기부터 깡패들의 주요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정재는 종로4가 광장시장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동대문사단이라고 불렸고, 김두한은 종로2가의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외에도 남대문시장에는 엄복만이 있었고, 일제강점기부터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던 명동에는 월남한 이북 출신인 이화룡, 정팔 등이 자리를 잡았다.

 

법정에선 이정재(좌)와 이화룡(우) (동아일보사)

깡패들이 시장 등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았던 데에는 앞에서 살폈듯이 많은 이익이 발생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여타의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1950년대의 서울에서 유독 발달했던 부분이 이른바 제3차 산업이었다. 즉, 도소매‧유통업과 유흥‧서비스업이 유난하게 발달했다. 따라서 깡패들이 이러한 분야에서 이익을 도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구역을 관리하고 질서를 잡는다는 조건으로 시장관리권을 장악하여 상인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조합비를 거두었으며, 따르지 않으면 협박이나 린치를 가했다.

 

또한 1950년대 깡패들은 정치권력과의 매우 긴밀한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50년대의 깡패들은 해방정국에서 우익청년단체에 몸담았고 좌익을 향한 정치테러 활동의 선봉에 섰다. 우익정치인들은 우익청년단체의 정치테러를 지지하고 나아가 권력의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익청년단체는 우익 정치인과 깡패들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 기능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고 정치적 경쟁세력들을 억누르기 위해 정치테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정치권력과 깡패들 간의 유착관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것이 이정재를 중심으로 한 임화수, 유지광 등의 동대문사단이었다. 이정재는 자유당 중앙당 감찰차장과 경기도 이천군당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당 내에서 입지를 굳혔는데, 이를 위해 그는 여러 가지 정치테러를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56년 진보당 집회 방해사건과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이다.

 

이정재는 야당의 정치집회에 부하들을 투입해 집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1957년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에서 주최한 장충단 집회에서는 김두한이 집회 경비를 맡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야당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치깡패들의 활동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장충단 집회 당시 부하들을 이끌고 집회장으로 들어간 동대문사단의 행동대장 유지광은 약 8개월 가까이 여유롭게 도피생활을 하다가 1957년 말에 자수했고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심지어 유지광은 도피 중에도 경쟁관계에 있던 명동파와의 집단 패싸움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4월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정치깡패들의 전성기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정치깡패의 거두 이정재와 임화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와 겨루던 이화룡, 이성순 등도 떠나갔다. 뿐만 아니라 군사정권은 사회정화사업이란 명목으로 걸인‧부랑배‧깡패 등을 잡아들여 국토개발사업에 투입하였다. 총칼을 앞세운 정부의 산업화 캠페인 속에서 깡패들이 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것은 착시였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정재 등이 떠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깡패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대문의 이정재와 명동의 이화룡이 물러난 뒤로 새롭게 서울 중앙에서 주름을 잡은 자는 이화룡의 뒤를 이은 신상사파였다. 두목인 신상현이 육군 상사 출신으로 제대했다고 해서 신상사파라고 불린 이 조직은 1960년대에 커다란 사건 없이 서울의 깡패세계를 장악했던 것으로 이야기된다.

 

1975년 1월에 벌어진 이른바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신상사파와 새로운 세력 간의 갈등 속에서 빚어진 이 사건을 통해 이른바 호남 주먹의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된다.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에는 이후 한국의 조직폭력배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가담했는데, 그가 바로 조양은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1976년에는 신상사파 습격을 이끌었던 오종철을 반대파가 난자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오종철을 난자하는 임무를 맡고 깡패들을 이끈 자가 바로 김태촌이었다.

 

1970~1980년대를 휩쓸었던 조양은(좌)과 김태촌 (동아일보사)

앞서 지적했듯이 조양은과 김태촌은 모두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왔다. 이들의 등장 이후 호남 출신의 깡패들이 오랜 시간 동안 서울을 장악해왔던 것으로 전한다. 언론 취재에 의하면 전라도 출신 깡패들의 상경은 196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졌다. 이들이 상경한 주된 이유는 ‘못 먹고 못 살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당대에도 한국 경제개발의 성과는 경부선을 중심으로 분배되고 호남지역은 소외되고 있다는 평가가 있었던 만큼 전라도 깡패들이 상경했던 커다란 이유는 지역에서 그들이 차지할 이익이 충분히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의 깡패들이 서울로 상경하기보다 자신들의 출신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해왔던 것과 비교할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1960년대 중반 서울로 올라온 호남 출신의 깡패들은 명동과 무교동, 서울역 등과 같이 확장 이전 서울의 중심이었던 공간에서 세력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후 강남개발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들의 활동공간도 더 넓어졌다. 1980년 조양은이 범죄단체조직혐의로 검거, 구속되었을 당시의 기사 내용은 이들이 개발붐을 타고 강남으로 뻗어나가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조양은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34평형 한양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의 조직이 개입했던 업소들도 중구 소공동의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을 비롯해 강남 신사동에 있는 궁전캬바레에 이르기까지 서울 각지에 있었다.

 

특히 새롭게 개발된 강남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다양한 조치들이 취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흥업소들의 이전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강남개발을 추진하면서 도심지 기능의 분산을 위해 대법원, 검찰청, 상공부청사 등 여러 행정기능을 강남으로 이전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도심지내에 유흥업소, 사치성목욕탕, 호텔, 여관 등을 신축할 수 없도록 하는 한편, 한강 이남의 천호, 영동(강남), 잠실 등지는 이러한 억제조치에서 제외되었다. 여기에 아파트 단지 건설 붐과 부동산 투기가 함께 작동하면서 강남 지역에는 빠른 속도로 대규모 이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따라 깡패들 역시 강남으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도시건설의 숨은 역군

 

2016년 9월 박원순 서울시장은 기자 설명회에서 도시정비사업 시행 시 강제철거를 예방할 종합대책을 수립했다고 발표하였다. 이 대책은 서울시에서 행하는 도시환경정비구역 혹은 재개발지역에서 공공연히 행해져 왔던 폭력적인 강제철거를 사전에 방지하고 빈곤층, 세입자 등 주거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서울시의 이번 조치는 수십 년 동안 자행되어 왔던 도시개발 과정에서의 철거폭력, 이른바 용역깡패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의지의 천명이었다.

 

현대 서울의 도시개발 과정은 주민들의 강제이주와 철거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과 전쟁을 치르면서 서울에는 이미 많은 피난민과 귀환자들이 몰려들어왔으며, 이들은 미군들이 사용하고 남긴 자재들을 이용하여 국공유지나 사유지를 막론하고 서울 곳곳에 무허가로 집을 지었다. 그 덕분에 서울 여러 곳에 수많은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1960~1970년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민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특히 서울의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 1963년에 이미 정부는 인구과밀화를 우려하여 서울시의 영역을 기존의 2배 가까이 확장하였다. 그렇지만 인구과밀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도시는 넓어졌지만 사람들이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나 일자리는 모두 도심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에 취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은 무허가 주택촌 해결을 위해 3대 정책을 내놓았다. 첫째로, 무허가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시 외곽에 마련한 정착지로 이주시키는 것이고, 둘째로, 도시계획에 현저히 방해되지 않는 국공유지에 지어진 무허가주택은 주민들의 ‘자조적인’ 노력으로 주택개량을 하고 소유권을 인정함으로써 양성화하는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서민용 시민아파트를 짓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항공사진까지 동원하여 기존 무허가주택이 몇 채 있는지 확인하고, 그 이후 생겨난 무허가주택은 강제로 철거해버렸다.

 

그런데 김현옥 시장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3대 정책은 정작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하등의 고려가 없었다. 단지 과밀화된 인구를 흩뜨려 놓으면, 나머지 생계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라는 식이었다. 이처럼 차후의 방안이 고려되지 않은 막가파식의 정책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은 그 귀결이었다. 청계천을 비롯해 서울 각지에서 살던 집을 철거당하고 성남 광주대단지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는 집도, 식수도, 일할 곳도 없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다시 서울로 향했고, 광주대단지 개발이라는 소문에 내 집 마련을 기대하며 철거민들의 이주딱지를 모아서 들어온 또 다른 전입자들은 서울시의 무대책에 분노했다.

 

이후에도 정부는 슬럼화된 무허가 주택촌을 정비하고 개발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실시해왔다. 그 종류도 다양한데, 자력재개발, 차관재개발, 위탁재개발, 합동재개발 등이 그것이다. 자력재개발의 경우 주민들의 경제력을 동원하여 주택개량을 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인 개량을 통해 도시를 정비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원할 수 있는 주민들의 경제력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사업은 충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76년에 시행된 차관재개발은 미국 대외원조기구인 AID로부터 차관을 얻어 재개발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차관을 제공한 AID는 또한 철거를 지양하고 기존의 도시환경을 정비하는 점진적인 재개발 방식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자력재개발 정책을 시행하면서 점진적인 주택개량 방식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게다가 대대적인 개발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고 도시미관을 정비하고자 했던 서울시의 의도와 AID의 의도는 크게 어긋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1978년 서울시와 정부는 위탁재개발 방식을 채택했다. 위탁재개발은 주민들이 공동주택건립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개발을 추진하면 시에서 행정지원을 하고, 건설업체에서 대규모 공동주택 즉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개발과정에서 주민들이 재정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주택지를 전면 철거하는 것이었다. 전면철거와 재정 부담은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촉발시켰으며, 특히 정부의 강제철거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게다가 철거과정에서 나타난 공권력의 폭력성은 정부에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 철거현장(노컷뉴스)

이에 서울시에서 새롭게 제시한 대책이 1983년에 내놓은 합동재개발 방식이다. 합동재개발 방식은 재개발을 추진할 경제력이 부족한 주민들과 재력과 장비가 있는 건설업체가 결합하여 개발을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인 개발계획과 시행은 주민들과 건설업체가 결합된 재개발조합에서 마련하고, 정부는 그에 대한 인․허가만 내주면 그만이었다. 또한 토지와 주택에 대한 권리를 가진 가옥주들은 재개발조합에 참여하여 개발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권리가 없는 세입자들은 턱없이 낮은 보상금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게다가 재개발조합에 참여한 집주인들은 개발이 늦어질수록 건설업체로부터 빌린 조합운영비, 보상비 등에 대한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개발을 신속히 진행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집주인과 세입자 간의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건설업체 또한 개발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부보다 더욱 신속하고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재개발을 추진하였다. 이 같은 개발에서 쫓겨나는 주민들의 삶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발의 광풍에 쫓겨나는 사람들을 억누르기 위해 이른바 용역깡패들이 등장하였다.

 

용역깡패들이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강제로 철거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들의 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물론 6월 항쟁의 성과로 얻은 언론 자유화의 영향이 크겠지만, 1984년 이후 가장 보편적인 개발방식이 된 합동재개발의 폐해가 나타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부에서 대대적인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실시하면서 재개발 예정지에서의 강제철거는 더욱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철거민을 향해 구슬을 날리는 용역깡패(김경만 감독-<골리앗의 구조> 캡처사진)

합동재개발 방식 또한 재개발에 앞서 기존 주택을 전면 철거하는데, 이때 철거를 집행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 철거반이란 이름으로 고용된 용역깡패들이었다. 용역깡패들의 폭력은 아주 무자비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1986년 신당동 재개발 예정지에서 이루어진 강제철거 과정에서 가옥주 대책추진위 회장인 고춘삼의 아들 고희남이 폭행을 당해 뇌가 파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한 어린이가 화장실에 빠지는 일도 발생했다. 또 철거반원들이 저항하는 여성 주민의 바지를 찢고 끌고 다니는가 하면, 철거반장이 속옷만 입고서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뛰어들어 모욕하고 희롱하기도 했다. 이처럼 폭력적인 강제철거에 대해서 꾸준히 문제제기와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앞세운 강제철거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철거현장에서 인면수심의 폭력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용역깡패들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에서는 철거민들을 반(反)사회적 용공세력으로 규정하여 감시했으며, 용역깡패들의 폭력은 재개발조합 측의 명도소송에 따른 철거집행이라는 명목 하에 눈을 감아버렸다.

 

2009년 1월에 일어난 용산참사에서도 용역깡패들의 폭력은 계속되었는데, 경찰은 주민들이 신고를 하더라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경찰은 폭력적인 상황이 끝난 후에 현장에 온다든지 혹은 가해자를 적은 액수의 벌금으로 풀어준다든지, 아니면 주민과 용역깡패들 사이에서 일어난 쌍방과실로 처리해버리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주민들의 생명권과 주거권을 보호해야할 정부와 경찰이 이처럼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철거민들의 저항은 일반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철거폭력이 개발이익을 둘러싼 사인(私人)간의 갈등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는 건설업체와 용역깡패들의 폭력을 방조하여 철거민들의 극단적인 저항을 이끌어냄으로써 강제철거와 폭력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용역깡패들은 경제적 욕망과 폭력으로 도시를 만든 숨은 ‘역군’이었다.

 

왼쪽, 철거반원들이 공포감을 주기 위해 그린 낙서(서울특별시) 오른쪽은 남일당 건물의 방화흔적(노순택)

새로운 이익의 창출을 위하여

 

한국의 깡패들은 이익을 좇으며 생존해왔다. 정부와 공권력은 명시적으로는 깡패에 대해 적대적이었지만, 정치적, 정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매우 긴밀하고 협력적인 행태를 드러냈다. 특히 도시의 개발과정에서 깡패들은 건설업체에 고용되어 법적, 행정적 명령에 따라 종사하는 철거반원으로 등장하여 경찰과 함께 철거민들을 쫓아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워진 상가와 아파트 분양 거래에도 개입하여 또 다시 이익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이익을 쫓아 떠도는 부나방들인 것이다.

 

이제 깡패들은 폭력을 앞세워 이익을 갈취하기보다 제도상의 허점을 파고들거나 대중이 즐겨 활용하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유흥업이나 대부업, 도박, 성매매, 마약, 건설업, 경비용역과 같은 형태의 이익 추구도 존재한다. 이들은 최신기술을 접목해서 인터넷 도박사이트나 메신저를 통한 성매매알선, 해외원정도박, 보이스피싱 등 예전보다 더 지능적이고 고도화된 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령기업을 차리고 허위로 재무재표를 만들어 대출사기를 벌이거나, 상가․부동산 거래 등에 개입하여 이익을 챙기고 있다. 심지어는 지방대학의 총학생회를 장악하여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새내기배움터, 축제, 졸업앨범 제작, 체육대회 등 각종 이권을 챙기거나 학생회비를 횡령하는 사례까지 등장하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오늘날의 세상에서 이제 깡패들은 도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익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망설임 없이 달려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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